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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살기로 한 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살림을 한 곳에 모으는데 몇 년이 걸렸다. 우리 가족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기에 정들었고 귀한 것이 된 물건이지만 좁은 새집에 다 옮겨 놓을 수 없었다. 용인집이 얼른 팔리지 않아 버리거나 남에게 주어야 할 물건의 처분이 몇 년간 지연됐었다.
가까스로 용인 집을 팔기로 계약하고 나서 급히 가방, 궤짝, 기념패, 책, 신발, 항아리를 포함한 두 트럭 분의물건들을 처분하고 한 트럭 분의 살림을 제주에 갖고 왔지만 아직도 나는 정든 물건들과의 작별을 계속하고 있다.
한꺼번에 와락 버리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골라 이별하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다 내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고 내가 들여다보던 책 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아니 죽고 난 다음에도 나와 함께 있지 못할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없애버리기가 너무 서운하다.
신앙서적들은 교회에 기증했다. 애지중지하던 Britannica 백과사전을 지역 도서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웃 동네에 "Santiago"라는 카페를 여는 이가 운 좋게 미국에서 끌고 온 고물 식탁과 함께 책을 찾이 했다.
자식들이 각기 기념될만한 사진을 골라가고 남은 사진첩은 사람 떠나버린 빈집 같지만 그냥 태워버릴 수가 없다.
그제는 수산복해(壽山福海)라고 쓴 족자(簇子)를 태워버렸다. 광주에서 사단 포병 사령관으로 근무할 때 정훈장교였던 이 기운 대위가 퍽 유명한 서예가에게 얻어준 것이다. 내 이름과 계급까지 써넣은 덕담(德談)의 스케일이 너무 거창해서 걸어두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버릴 수도 없었다. 족자의 처리를 두고 고민하는 동안 사라지던 내 아픔이 다시 도저 왔다.
5. 18 사태 때 이 기운 대위는 계엄군에 파견되어 MBC 방송에 연락장교로 나가 있었다. 도청이 점령되고 형무소가 습격당하던 날 저녁 이대위가 내게 전화를 했다. 방송국이 타고 있는데 건물 주위에는 “폭도”들뿐이라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파견된 부대에 연락해서 지시를 받으라고 했더니 전화 불통이란다. “안전 귀대”가 내가 해준 이야기의 전부였다.
폭풍전야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을 때 지역 책임이 없는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퇴근 후 지면이 있는 종교계의 지도자들과 서중(西中) 선후배들을 찾아다니며 평화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었다.
학생군사훈련차 사단에 입소한 대학생들을 귀가시키라는 상부 지시를 받고 학생들에게 사태의 원만한 수습에 기여해줄 것을 호소한 뒤 애국가를 힘차게 함께 부르고 해산시켰었다.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빚어냈다. 질서는 파괴되고 귀한 생명과 재산이 희생되고 사라젔다. 군의 명예도 실추되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민주화 과정의 희생자는 늘어가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고 군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정확한 기록도 없고 객관적인 연구도 없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이들의 다수가 고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발포 책임자를 규명한다고 한다.
목숨이 길어봐야 욕이나 보기 십상인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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